미국에 대한 인상

재미있다. 인터뷰이들의 의견에 동의하든 안하든, 한국인이 미국에 대해 가지는 인상이 얼마나 단편적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by 카오 | 2010/01/31 21:52 | 트랙백 | 덧글(0)

무지에 대한 인식

동생은 종종 전화로 재미있는 화제를 꺼내온다. 성주그룹의 김성주부터 시작해서 지구온난화가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아냐느니. 주로 고등학생인 친구들과 말하기에는 조금 재미없을 수도 있는 시사적인 내용들이 많은 것 같다. 물론 개중에는 내가 아는 것도 있고, 처음듣는 이야기도 있다. 항상 후회하는 것은 처음듣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급히 결론을 지어버리려는 태도다. 동생한테는 틀안에서 벗어난 사고를 하라 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새로운 정보를 분석할 툴을 언제나 구비하고 있는 양 인스턴트식 사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좋지 않은 것 같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좀 더 복잡한 감정이 든다. 동생의 말투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어조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인지, 상당히 도전적으로 들리고 마는 것이다. 특히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에 대한 화제가 나오면 그렇다. 나는 어느정도 기본적인 쟁점을 알고 더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 이슈를, 마치 이건 몰랐지라는 식으로 말해오는 것이다. 물론 그 정보원이 어디였는지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대충 감이 잡힌다. 어떤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내용을 단지 '논리적으로 느껴진다'는 이유만으로 신뢰하는 것이 아쉽다고 생각하면서도, 서로가 어떤 지식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는가를 개략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면 대화가 어렵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마주앉아서 길게 이야기를 한 지가 정말 오래되었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카테고리화 되어 있던 내용에 대해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그 속에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사실은 나도 하나도 모르면서, 그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바깥에서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조그만 지식에 불과할텐데, 그 조그만 조각에 대한 만족감이 다 자기기만인 것은 아닌가. 결국 나는 이 의문을 긍정할 수 밖에 없었다. 머리가 굳어졌다고 할까. 안다고 생각하면 거기서 끝이건만. 그 많던 호기심이 다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무언가를 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by 카오 | 2010/01/29 00:08 | 생각 | 트랙백 | 덧글(0)

공부계획

20세기초 현대물리학의 기초를 세운 대가들과 지금의 물리학자가 다른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인식에 대한 철학적 해답의 추구여부가 아닐까.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제창하는데에 있어 마하의 사유경제설에 큰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후기 아인슈타인은 이 관점을 포기하고 인식과 독립된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을 취한다) 당시의 물리학을 단순히 수학으로 자연을 기술하는 닫힌 학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유럽 지식인층 특유의 교양으로서 철학과 심리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고, 그 중 많은 이들이 개성적인 철학적 견해를 보인다. 마흐의 영향권에 놓인 실증주의 과학자들도 있었고, 보어처럼 아예 독자적으로 견고한 철학체계를 세워버린 사람도 있었다.

말년의 아인슈타인은 코펜하겐 해석이 물리학자들 사이에 널리 받아들여짐으로 인해 점점 발언권을 잃어갔다. 현재 출판되고 있는 물리학 교과서 중에는 인식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관점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아예 틀린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책조차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과연 보어의 상보성이론 만이 원자세계에 대한 해석으로서 유일한 답인 것일까? 마지막까지 아인슈타인의 편에 섰던 디랙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양자역학이 실험결과를 해석하는 강력한 설명능력을 지녔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이 완성형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자, 위와 같은 동기로부터, 일단 다시 읽어봐야 할 원전들을 생각해보았다. 제대로 공부할려면 몇년이 걸릴지 모르겠다.

유클리드(기하학 원론) 
뉴턴(프린키피아는 기하학 원론의 형식을 모방했다.), 호이겐스, 라이프니츠의 방대한 저작,
마하
아인슈타인, 디랙
파울리, 페르미
포앵카레(과학과 방법), 로렌츠
드 브로이, 슈뢰딩거
보어, 하이젠베르크

by 카오 | 2010/01/24 22:06 | 메모 | 트랙백 | 덧글(0)

완벽주의자

최근에서야 내가 완벽주의자였음을 진심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완벽주의와 완벽의 차이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완벽주의는 있을 수 있어도 완벽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부족한 것을 채워가며 평생을 성장하는 동물이건만 왜 그 간단한 진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있지 못했던 것일까. 아마도 스스로 완벽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완벽주의는 너덜너덜거리고 허약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현실에 대한 요구가 아니었다. 내면에 대한 요구였다. 완벽하게 이상적인 것을 생각하려 하면서 그 생각자체의 불완전함에 극도의 불만과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불만이라는 감정이었다는 것도 최근에야 눈치를 챘다. 완벽한 세계를 구축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모순이 안에서부터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탈출구가 보인다. 적어도 해답의 실마리를 알고 있다. 내면에 대한 완벽을 포기하고 스스로 제한하고 있던 생각의 특수성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더 많이 실패하고, 더 많이 웃음거리가 되게 노력하는 일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멈추지 않고 걷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정신도 물이 고이면 썩는 것처럼 부패한다. 그렇다고 방부제를 뿌려서야 되겠는가. 어느쪽이나 마시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죽지않는 길은 흘러가는 것 뿐이다.

완벽한 인간의 내면은 다른 사람이 들어올 틈도 없게 꽉 차 있다. 수정될 여지가 없는데 어떻게 상호작용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아까도 말했듯이 완벽주의인 인간은 있을 수 있어도 완벽한 인간은 있을 수 없다. 완벽주의인 인간은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거부한다. 조금의 먼지도 마시지 않는 대신에 그보다 훨씬 큰 보물들을 버리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완벽주의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스스로의 생각을 관찰하고 메타인지적인 삶을 살아가겠는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느껴지는 공허하고 허무한 감정에는 사실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이유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창작한 결과물들만을 보고 스스로가 대충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함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처음부터 불가능한 완벽을 가정하다보니 결국 첫 시도에서 보잘것 없는 결과가 나오면 큰 실망과 함께 결국에는 체념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게 인생이다 하며 잘못된 판단을 반복하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지금까지 추구했던 변화는,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그 태도 자체를 타파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제대로된 독해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이 바로 앞문장에 대해 정당한 위화감을 느끼며 나의 부족한 표현력을 비웃을 것이다. 열심히 자가당착을 피하는 문장을 지어보려 했으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아직 완벽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일까.

한가지 대안은 정신으로 완벽함을 추구하기 이전에 행동하는 길이다. 이것이 옳은 행동이다라는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약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와 같이 생각이 흘러 넘치는 바람에 때때로 행동할 시기를 놓치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멈춰있는 나여, 앞으로 나아가자.

by 카오 | 2010/01/19 21:17 | 생각 | 트랙백 | 덧글(4)

임진강



by 카오 | 2010/01/17 14:15 | 트랙백 | 덧글(0)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박지원, 노자, 공자, 장자, 홍자성, 맹자, 증자, 손자, 강태공, 사마천, 주희, 안연, 이이, 이황, 서경덕, 김부식, 김시습, 정약용, 최한기, 최제우. 안중근

탈레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리스, 플루타크, 플라톤, 키케로, 마키아벨리, 아우레우스, 푸코, 에코, 스미스, 맑스, 맬더스, 리카도, 케인즈, 셰익스피어, 톨킨, 하이데거, 풋살, 러셀,  비트겐슈타인, 촘스키, 지젝, 다윈, 도킨스, 굴드, 데닛, 톨스토이, 타고르

데카르트, 뉴턴, 라이프니츠, 호이겐스, 페르미, 보즈, 아인슈타인, 푸앵카레, 만델브로트, 파울리, 디랙, 보어,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넬슨, 마하, 포퍼, 쿤, 임례, 파이어아벤트

예수, 그리고 부처

감사합니다. 위대해지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솔직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진실하단 말보단 솔직하단 말이 더 솔직한 것 같군요.

따라가지 못해도 상관 없습니다. 당신들과 만났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난 잘 모릅니다.

현실은 상상밖에 있습니다. 상상은 그것을 뛰어넘으려 합니다. 그리고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과학으로 철학으로 경제학으로 사회학으로 언어학으로 정치학으로 인류학으로 종교학과 종교로 나와 타인을 규정지으려 할겁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냥 이 시대의 패러다임으로 인해 나를 불행하게 혹은 행복하게 생각하겠지요.

나는 이제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그것들을 추구할 겁니다.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고독하기 때문에 관계의 소중함을 압니다.

글은 글이 되는 순간 나를 떠납니다.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차근차근히, 그러나 정해진 순서는 없습니다.

우연이 훌륭한 점은 그것이 최선의 필연이기 때문이지요.

감사합니다.

나를 있게 해준 모든,

내가 기억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앞으로 만날 모든 만남들이여.

by 카오 | 2010/01/09 03:31 | 끄적임 | 트랙백 | 덧글(2)

남독濫讀에 대한 대처

새해에는 독서계획을 제대로 세워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독서가 생활을 잡아먹기 시작한다. 좋지 않다. 고쳐야 할 것이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뭐든지 읽어야만 한다는 강박을 느끼면서 문자화된 정보를 신뢰하지 못하는 모순적인 태도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많아도 마음속 바른 곳에 정착하는 것은 별로 없다. 기억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음식을 꼭꼭 씹어먹지 않아서 건데기 채로 위장을 표류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태다. 소화가 안되는 이유는 비판력과 논리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읽을 때, 천천히 고려해야 할 부분과 그냥 넘겨야 될 부분을 구별하는 순발력도 절실하다.

둘째는 읽기만 하고 쓰지 않는 생활이다. 일단 머리속에 들어온 정보는 그대로 놔두면 안된다. 배출해야 된다. 물론 자연적인 망각의 힘에 의지하는 수도 있겠으나,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글로 쓴 후 잊어버리는 것이다. 어느 정도 잊은 후에 다시 읽어 대상에 대한 사색을 심화시키는 훈련을 해야만 한다. 범재의 머리로서는 한계가 있다. 전공과의 관련도 약한 지식이 소화도 안된채로 빵빵하게 불어터져서는 실생활이 위태로워진다. 생각했던 것들을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시간을 두기위해서는 자주 글을 써서 주기적으로 머리를 비워버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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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썼던 글이랑 다른게 별로 없구만... 똑같은 말만 반복하지 말고 실천을 해라 실천을. 쓰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쓰는 것이 그리 두려운가?

by 카오 | 2010/01/03 00:38 | 트랙백 | 덧글(0)

추측

진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하는 것이다. 과학만능주의로 대표되는 서양의 '합리적인 정신'이 극단으로 치닫을 때는 이론이 현상을 압도해버리는 웃지못할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완벽하고 유일한 진리는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한다는 집착때문에, 학문이라는 행위는 '소문으로 존재하는' 금맥을 찾으려는 골드러쉬로 격하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래야 한다. 이래야 할 것이라는' 아집을 자연에 강요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자연은 반박하지 않고 묵묵히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혹시 또박또박 정확하게 말하려고 하는 태도 때문에 부드럽게 눈빛을 주고받는 등의 언어외적 요소에 대한 통찰을 잃어 버린 것은 아닌지? 비트겐슈타인이 지인의 제스쳐 하나에 논리철학논고를 철회하고 다시 철학으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의 정신은 언어를 재료로 견고한 논리의 탑을 쌓은 후 종종 그것을 현실로 착각하게 하는 도착증세를 보인다. 엄밀한 의미의 논리는 거짓을 자를 수는 있어도 진실을 덧붙일 수는 없는 것이다.

by 카오 | 2009/12/16 05:14 | 생각 | 트랙백 | 덧글(12)

첫 TA

마음 같아서는 아직도 신출내기 학부 1학년 꼬꼬마 생퀴같은데, 어느 덧 석사과정 두번째 학기도 가을처럼 여물어가고 있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저버리는 것이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 비실천의 딜레마를 벗어나게 해줄 작은 일이 오늘부터 시작되었다. 일주일에 하루 담당하는 기초물리학 실험의 조수 역이다.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지는 것 같다. 물론 준비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에는 제약이 있으므로 완벽이란 것은 환상속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대충 어느정도 선에서 타협하고 다른 일과 병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게 잘 안된다. 한 일에 집중한다고 효율이 좋은 것도 아니어서 간단한 일을 마치는 데에도 남들보다 두 세배의 시간을 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험준비로는 대충 중요한 포인트만 뽑아서 노트검사시에 필요할 정도의 흐름만 파악하고 있으면 되는 것을, 결국 나의 소심함은 실험노트까지 따로 작성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임한 TA일의 시작은 생각보다 그렇게 바쁘지는 않았다. 1학년의 실험에서 TA가 손 댈일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실험이 끝난 학생이 노트를 가져올 때 까지는 가끔 발생하는 간단한 문제만 해결해 주면 되었다. 실험 시작은 오후 1시였는데, 3시 정도가 되니 한 두 팀씩 검사를 맡으러 오기 시작하고, 4시가 지날 때는 내가 앉은 책상으로부터 긴 행렬이 생겼다. 이 때부터는 화장실로 못 갈 정도로 바빴는데 마지막 팀의 노트검사를 마치고 나니 6시가 다 되었다.

처음이라 기합이 들어가 있었는지, 검사를 받고 집에 돌아가려는 아이들에게 오는 종종 수정사항을 요구하며 실험실로 되돌려 보냈다. 이런 입장에 서본 것은 거의 처음이라 신기했다. 그리고 질문에 대답하는 학생들의 패턴을 보며 여러가지 느낌을 받았다. 무엇을 질문받을지 예상하고 준비해오는 학생, 평소엔 대충 넘어가던데 왜 이렇게 짜게 구냐라는 표정을 짓는 학생, 긴장한 나머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학생, 등등..

(쓰는 중)

by 카오 | 2009/11/11 20:46 | 일상 | 트랙백 | 덧글(0)

입출력

신영복 교수가 쓴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에는 인식과 실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식->인식->인식의 순환만으로는 그저 인식밖에 못하는 바보가 된다는 맥락의 글이었던 것 같다. 머리로 아는 것과 진짜 아는 것은 다르다. 사실 나는 안다는 것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의 입력만으로 마치 가치있는 지식을 얻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마는 것 같다. 어떤 말에 익숙해진다는 것과 그 말이 나타내는 것 자체에 익숙해지는 것은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연구실은 일반적으로 봤을 때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아니, 그곳의 일상은 아주 협소하고 작은 진실을 추구하는 국소적인 현실이다. 방사선, 전자기장, 반입자, 가속기, 신치레이션 검출기, 매일매일 주고받는 대화속에 오고가는 어휘는 그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없다. 기계적인 말의 홍수에 귀를 묻고 있자면 따뜻하거나 차가운, 혹은 자극적인 말들에 갈증을 느끼게 된다. 인간적인 어휘라는 말이 적당한 표현인지는 의심이 들지만, 굳이 나타내자면 그렇다. 그런 말들이 그립다. 그래서 바람을 핀다. 하루키를 읽고 데카르트를 읽는다. 연애라는 개념이 진짜 프랑스 문학에서 나온건지 의심하면서 읽는다. 언젠가는 나도 가족을 먹어살리겠지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재테크를 읽고, 그 보다 좀 더 고상한 욕구 때문에 토플러와 나쁜 사마리아인을 만난다. 포앵카레는 그냥 좋다.

이렇게 해서 내 지식은 생활에서 나오는 직관과 확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논리적인 판단력이 부족한 인간이 무분별하게 지식을 흡수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주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나다. 체계가 없고 난잡하다. 언젠가는 한 번 머릿속을 대청소 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말하면서 미룬다. 정리하기 귀찮은건 기숙사방도 마음도 마찬가지다. 뇌세포 안에서 싸우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희미한 기억으로 왜곡된 위인들이다. 나는 방관자다. 내안에서 나는 벙어리가 된다.

배운 것을 실천할 용기도 없고 확신도 없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뭘 배웠는지 확인하는 길일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쓴다. 이건 어디서 본 말인지, 나는 그것을 진실로 인정하는지, 생각하다보면 대부분의 주제에 대해 결정을 유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래서 펜을 잡는다. 무슨 주제를 어떻게 써야될지, 아무런 감도 없다. 그래서 아주 싼 수첩을 산다. 그렇게 정처없이 둥둥 떠다니는 생각들을 종이위에 옮겨놓고 나면 조금은 기분이 가라앉는다.

입력을 했으면 출력이 필요하다. 출력은 다시 입력을 필요로 한다. 입력한 것을 바르게 출력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소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소화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아이에게 계속 분유만 먹인다고 장이 튼튼해질 것인가. 설사를 하더라도 조금씩 밥을 먹여야 한다. 언젠가는 진정한 의미의 실천을, 손가락이 아닌 팔과 다리로 하게 될 날을 간절히 바란다. 그런 경지를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아기다. 이제 갓 태어난 신생아로 눈조차 제대로 뜨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손가락이나 빨아야 할 정신이 밥을 먹으려 욕심을 부리니 탈이 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녕 그 단 밥이 설사나 토가 되어 고약한 냄새가 난다 할지라도, 표현의 의무를 느끼는 것은 거역할 수 없다. 장 안에서 썩는 것 보다는 내보내는 것이 낫겠지. 오늘도 그런 이유로 미완성인 나를 출력한다.

by 카오 | 2009/11/06 18:19 | 끄적임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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