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06일
입출력
신영복 교수가 쓴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에는 인식과 실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식->인식->인식의 순환만으로는 그저 인식밖에 못하는 바보가 된다는 맥락의 글이었던 것 같다. 머리로 아는 것과 진짜 아는 것은 다르다. 사실 나는 안다는 것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의 입력만으로 마치 가치있는 지식을 얻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마는 것 같다. 어떤 말에 익숙해진다는 것과 그 말이 나타내는 것 자체에 익숙해지는 것은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연구실은 일반적으로 봤을 때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아니, 그곳의 일상은 아주 협소하고 작은 진실을 추구하는 국소적인 현실이다. 방사선, 전자기장, 반입자, 가속기, 신치레이션 검출기, 매일매일 주고받는 대화속에 오고가는 어휘는 그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없다. 기계적인 말의 홍수에 귀를 묻고 있자면 따뜻하거나 차가운, 혹은 자극적인 말들에 갈증을 느끼게 된다. 인간적인 어휘라는 말이 적당한 표현인지는 의심이 들지만, 굳이 나타내자면 그렇다. 그런 말들이 그립다. 그래서 바람을 핀다. 하루키를 읽고 데카르트를 읽는다. 연애라는 개념이 진짜 프랑스 문학에서 나온건지 의심하면서 읽는다. 언젠가는 나도 가족을 먹어살리겠지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재테크를 읽고, 그 보다 좀 더 고상한 욕구 때문에 토플러와 나쁜 사마리아인을 만난다. 포앵카레는 그냥 좋다.
이렇게 해서 내 지식은 생활에서 나오는 직관과 확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논리적인 판단력이 부족한 인간이 무분별하게 지식을 흡수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주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나다. 체계가 없고 난잡하다. 언젠가는 한 번 머릿속을 대청소 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말하면서 미룬다. 정리하기 귀찮은건 기숙사방도 마음도 마찬가지다. 뇌세포 안에서 싸우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희미한 기억으로 왜곡된 위인들이다. 나는 방관자다. 내안에서 나는 벙어리가 된다.
배운 것을 실천할 용기도 없고 확신도 없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뭘 배웠는지 확인하는 길일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쓴다. 이건 어디서 본 말인지, 나는 그것을 진실로 인정하는지, 생각하다보면 대부분의 주제에 대해 결정을 유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래서 펜을 잡는다. 무슨 주제를 어떻게 써야될지, 아무런 감도 없다. 그래서 아주 싼 수첩을 산다. 그렇게 정처없이 둥둥 떠다니는 생각들을 종이위에 옮겨놓고 나면 조금은 기분이 가라앉는다.
입력을 했으면 출력이 필요하다. 출력은 다시 입력을 필요로 한다. 입력한 것을 바르게 출력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소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소화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아이에게 계속 분유만 먹인다고 장이 튼튼해질 것인가. 설사를 하더라도 조금씩 밥을 먹여야 한다. 언젠가는 진정한 의미의 실천을, 손가락이 아닌 팔과 다리로 하게 될 날을 간절히 바란다. 그런 경지를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아기다. 이제 갓 태어난 신생아로 눈조차 제대로 뜨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손가락이나 빨아야 할 정신이 밥을 먹으려 욕심을 부리니 탈이 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녕 그 단 밥이 설사나 토가 되어 고약한 냄새가 난다 할지라도, 표현의 의무를 느끼는 것은 거역할 수 없다. 장 안에서 썩는 것 보다는 내보내는 것이 낫겠지. 오늘도 그런 이유로 미완성인 나를 출력한다.
연구실은 일반적으로 봤을 때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아니, 그곳의 일상은 아주 협소하고 작은 진실을 추구하는 국소적인 현실이다. 방사선, 전자기장, 반입자, 가속기, 신치레이션 검출기, 매일매일 주고받는 대화속에 오고가는 어휘는 그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없다. 기계적인 말의 홍수에 귀를 묻고 있자면 따뜻하거나 차가운, 혹은 자극적인 말들에 갈증을 느끼게 된다. 인간적인 어휘라는 말이 적당한 표현인지는 의심이 들지만, 굳이 나타내자면 그렇다. 그런 말들이 그립다. 그래서 바람을 핀다. 하루키를 읽고 데카르트를 읽는다. 연애라는 개념이 진짜 프랑스 문학에서 나온건지 의심하면서 읽는다. 언젠가는 나도 가족을 먹어살리겠지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재테크를 읽고, 그 보다 좀 더 고상한 욕구 때문에 토플러와 나쁜 사마리아인을 만난다. 포앵카레는 그냥 좋다.
이렇게 해서 내 지식은 생활에서 나오는 직관과 확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논리적인 판단력이 부족한 인간이 무분별하게 지식을 흡수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주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나다. 체계가 없고 난잡하다. 언젠가는 한 번 머릿속을 대청소 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말하면서 미룬다. 정리하기 귀찮은건 기숙사방도 마음도 마찬가지다. 뇌세포 안에서 싸우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희미한 기억으로 왜곡된 위인들이다. 나는 방관자다. 내안에서 나는 벙어리가 된다.
배운 것을 실천할 용기도 없고 확신도 없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뭘 배웠는지 확인하는 길일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쓴다. 이건 어디서 본 말인지, 나는 그것을 진실로 인정하는지, 생각하다보면 대부분의 주제에 대해 결정을 유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래서 펜을 잡는다. 무슨 주제를 어떻게 써야될지, 아무런 감도 없다. 그래서 아주 싼 수첩을 산다. 그렇게 정처없이 둥둥 떠다니는 생각들을 종이위에 옮겨놓고 나면 조금은 기분이 가라앉는다.
입력을 했으면 출력이 필요하다. 출력은 다시 입력을 필요로 한다. 입력한 것을 바르게 출력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소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소화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아이에게 계속 분유만 먹인다고 장이 튼튼해질 것인가. 설사를 하더라도 조금씩 밥을 먹여야 한다. 언젠가는 진정한 의미의 실천을, 손가락이 아닌 팔과 다리로 하게 될 날을 간절히 바란다. 그런 경지를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아기다. 이제 갓 태어난 신생아로 눈조차 제대로 뜨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손가락이나 빨아야 할 정신이 밥을 먹으려 욕심을 부리니 탈이 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녕 그 단 밥이 설사나 토가 되어 고약한 냄새가 난다 할지라도, 표현의 의무를 느끼는 것은 거역할 수 없다. 장 안에서 썩는 것 보다는 내보내는 것이 낫겠지. 오늘도 그런 이유로 미완성인 나를 출력한다.
# by | 2009/11/06 18:19 | 끄적임 | 트랙백 | 덧글(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