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보

톨스토이의 인생론에서는 물레방아를 돌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그 원리에 관심을 가지는 청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결국 그 청년의 행위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무가치한 것으로 논증이 끝났던 것 같다. 몇년전에 읽었기 때문에 가뭇가뭇 하지만, 청년이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은 그의 무의미한 착각이라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 몇년간을 되돌이켜보면 내 모습이 바로 이 청년과 꼭 닮지 않았었나 싶다. 제대로 공부해보겠다고 마음을 다잡은 적도 없고, 항상  내가 지금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실제 행위와는 관계가 옅은 문제로 머리를 썪히고 있었던 것 같다. 3차원 구형좌표에서의 슈뢰딩거 방정식을 풀면서도 수소원자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회의를 지니며,  대부분이 아무런 의심도 하지않는 물리법칙의보편성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학부과정 4년동안 나는 한 번도 그 누구와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해 본 적이 없다. 물리학과 동기들도, 교수님들도,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통찰력있는 답변을 들은 적이 없다.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물리학과나 화학과 생물학과가 아닌 문학부 에서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 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졸업전에 객기로 이수한 과학철학수업도, 그리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지 못했다.

물리학과는 그리 만만하지 않다. 다른 모든 활동이 그렇듯이 재능만큼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물리학이 수학 다음으로 체계화된 정합성을 지닌 학문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여기서 체계화 되어 있다는 것은, 첫째로 부분과 부분, 분야와 분야 사이에 끈끈한 상호관련성이 있으며, 둘째, 기초지식을 바탕으로해서 고급지식으로 넘어가는 단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뉴턴역학을 좀 더 수학적으로 세련되게 기술한 것이 해석역학이고, 맥스웰의 단원자 기체모델을 먼저 배우고 본격적인 통계역학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전 단계를 바르게 이해하면, 처음부터 그 다음 단계를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용이하게 지식을 습득해 갈 수 있다. 여기에는 시간이 걸리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시간을 투자한 만큼 실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와서야 이렇게 말하지만 난 물리학과 학생으로서 그리 성실하지 못했다. 학부를 졸업하고 나서야 전체에 대한 흐릿한 조감을 얻었을 뿐이다. 변명아닌 변명을 하자면, 하나하나씩 밟으며 수행해야 했던 단계들을 무시하고 대뜸 전체상부터 얻으려고 했던 것이 치기어린 실수였던 것 같다. 전체에 대한 조감없이 하나하나만을 파는 것으로는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물리의 학습에 있어서는 먼 앞이 보이지 않아도 당장 눈앞에 놓인 계단 하나를 올라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싶다.

한숨쉬는 소리를 하다가 갑자기 삼천포로 빠졌는데, 여튼 나는 위에 쓴 사항들을 실행해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유보하면서 몇년 내내 생각했지만 결론을 얻지 못한 질문들, 내가 하는 것이 진정 과학일까. 정해진 커리큘럼 위에서 꼭두각시 처럼 배우고 따라하는 것이 과연 진정 학문을 하는 것일까. 이 방대한 학문의 바다에서 난 과연 소금기에 절지 않은 물고기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로 스스로를 괴롭혀 왔다. 가끔은 내게 이성이라는 것이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미안하다. 공지로는 제대로 된 글을 쓴다고 해놓고서는 이런 허섭글을 남겨버리다니. 같은 고민이라도 진지하고 체계적이지 않은 고민은 그저 단어의 나열에 지나지 않을 터인데. 그래도 어쩌겠나. 글에 서두가 없는 것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을 지닌 나같은 범인이 지고 가야할 숙명이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당분간은 반복될 듯 하다.

by 카오 | 2009/10/16 21:02 | 생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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